과학사는 글자 그대로 과학의 역사이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사는 과학을 역사적 현상으로 취급해서 그것의 형성 및 변천, 전개 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 분야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사의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목표는 과학의 개념, 법칙, 이론, 방법 등이 역사상 어떻게 형성되어 변화하고 발전되어 왔나를 이해하려는 것이 된다.
한편 과학사라는 분야가 형성되어 자라온 과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각각의 과학분야들이 지니고 있던, 자신들 분야의 역사 연구와 교육의 전통이다. 물론 이들 분야사들은 각각의 과학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대부분 그 분야의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 교육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분야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흥미 외에도, 과학의 개념, 이론, 방법 등이 변천한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과학에서의 개념, 이론, 방법 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했고, 또한 자신의 분야의 과거의 전통을 찾아내고 학생들을 그 분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각 분야의 분야사는 그 분야의 성립 초기에는 꽤 중요하게 여겨졌고 때로는 그 분야의 성립 초기에는 꽤 중요하게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학분야들이 발전되고 그 내용이나 연구인력이 점점 전문화되고 그렇게 전문화된 분야의 지식 자체가 점차 그 분야 외부의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에 따라 각 과학 분야들에서 분야사의 학문적 중요성은 차츰 감소하게 되었다.
과학사의 유래의 또 한 갈래는 인류의 지식 전체의 발전 과정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관심은 물론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 oteles, B. C. 384-322)에서부터 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의 본질과 그 적절한 사용방법을 알기 위해 인류의 지식의 역사의 필요성을 강조한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에서 >비롯하여, 18세기의 콩도르세(Condorcet, 1743-1974)와 19세기의 콩트(August Comte, 1789-1857) 등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간헐적인 관심의 표시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들어서서 실제 과학사의 연구로 이어지고 구체적 업적을 낳기도 했다.
이렇게 두 갈래로 자라온 과학사의 연구는 20세기에 접어든 후 본격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잡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몇 학자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철학사학자들이 과학의 역사를 두고서도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의 역사에 대해 깊이 다루면서 과거의 과학적 개념들을 과거의 사상적 맥락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카시러(Ernst Cassirer), 러브조이(Arthur O. Lovejoy)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본보기는 코이레(Alexandre Koyre)와 같은 학자로 하여금 초창기의 과학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유용성이 지속되는 훌륭한 업적을 낳게 했다.
다른 또 한 가지 영향은 과학사라는 독자적 분야의 형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선구자들의 노력이었다. 이들은 어느 면에서 베이컨으로부터 콩트에 이르는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와 다른 점은 인류의 지식 중에서 과학을 하나의 단위로 주목했고, 그 발전을 살핌에 있어 각각 의 과학 분야들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전체로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싸튼(George Sarton, 1884-1956)이 이런 경향을 보인 대표적 예인데 그는 과학사학의 대표적 전문학술지인 아이시스(Isis)를 창간, 편집했고 하바드 대학에 과학사학 강좌를 처음 개설하는 등 과학사라는 독자적 학문 분야의 성립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거의 혼자서 기울였다.
코이레나 싸튼 같은 학자들의 영향은 1940년대 초에 이르면서 과학사 자체를 전공으로 하고 과학사의 몇몇 전문 분야에서 본격적 연구업적을 내는 여러 학자들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코이레로부터 지적인 자극을 받고 싸튼의 노력에 의한 독자적 분야로서의 과학사에 대한 인식으로 무장되었다. 과학사 분야를 두고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어느 분야로 나갔어도 학문적으로 대성할 수 있었을 만큼 극히 유능한 이들 초창기 과학사학자들[쿤(Thomas S. Kuhn), 홀(A, Rupert Hall), 길리스피(Charles C. Gillispie), 코헨(I. Bernard Cohen)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서 서로 활발하고 진지한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과학사의 연구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과 업적이, 극히 제한된 수의 대학에만 과학사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던 당시에 이들을 여러 다른 대학에서 받아들이도록 했고, 5O년대말부터 60년대에는 이들에 의해 과학사의 전문 교육을 받은 많은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이 같은 일은 마침 미국 대학들의 대규모 양적 팽창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그에 따라 60년대를 통해 미국의 모든 주요 대학들에 과학사의 학과나 전공과정이 개설되고 전문 연구인력의 급속한 팽창과 연구 수준의 빠른 확립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미국에서 시작된 과학사 분야의 이 같은 학문적 발전은 곧 유럽, 일본 등 세계 여러 지역으로 파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들어 과학사 분야에 대한 일반적 관심과 함께 이 분야의 교육, 연구 등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과학사라는 학문 분야는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왜 우리가 과학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 사회 속에서 과학이 점하는 중요한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현대 사회에서의 과학은 완전히 전문직업화해서 사회 속에 제도적으로 존재한다. 사회의 인력의 아주 큰 부분,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의 큰 부분이 과학에 종사하고 있으며, 정부와 사설 단체의 막대한 예산이 과학의 교육과 연구에 투입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과학은 굉장히 큰 힘과 실용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 비단 기술을 통해서 나타내게 되는 '물질적'인 힘만이 아니라 방법면에서도 과학은 큰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되어서, 흔히 '과학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옳고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까지 있다. 자연과학 분야들만이 아니라 사회나 인간의 현상에 대해 다루는 소위 '사회과학' 분야들마저도 자연과학의 방법을 표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현대 사회가 당면한 여러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과학과 연관되어 있다. 에너지 문제에서부터 식량, 환경 ,인구 문제, 무기 개발 및 억제 문제 등 인류가 당면한 큰 문제들이 모두 그런 예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인 과학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 특히 현대 사회의 형성과정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전통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 대 사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역사학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의라고 한다면 과학의 역사는 역사의 여러 분야들 중에서도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이 중요한 위치를 지니는 현대 사회에서 직접 과학자가 아닌 일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전문적인 과학 지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니라, 과학 지식의 사용이 가져오는 효과들 중에서의 선택이거나 그런 효과들을 위해 사회가 과학 활동에 제공해야 할 투자, 지원 등에 관한 문제이고,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과학 내용상의 지식보다는 오히려 과학 지식의 일반적 성격, 과학 활동의 특징, 과학 활동과 사회의 여러 요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더 필요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 과학사가 그 특유의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역사 속에 나타나는 과학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 특히 과학이 현대 사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된 과정에 대한 이해는 현대 사회에서의 과학에 대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해를 깊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사는 비단 과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이 같은 면의 이해를 증진시켜줌으로써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 나가는 일을 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영식 저 「역사와 사회속의 과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