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록
1920년 오스트리아의 내분비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Eugen Steinach, 1861-1944)가 고안해 낸 회춘 수술은 1921년 미국에 도입된 직후 ‘슈타이 나흐 수술(Steinach Operation)’이라 불리며 크게 유행했다. 이 수술은 1930년 무렵 급작스레 사라졌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회춘 연구라는 점에서 역사가들은 그에 관심을 가져왔다. 기존 연구에서 슈타이나흐 수술은 당대 과학 연구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한편, 이 수술의 몰락과 1930년 무렵 새롭게 등장한 회춘 치료인 호르몬 연구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당대 슈타이나흐 수술의 권위자였던 해리 벤자민(Harry Benjamin, 1885-1996)의 행보를 추적하면, 다음 두 가지 맥락에서 슈타이나흐 수술과 호르몬 연구 사이의 연속성을 살필 수 있다. 하나는 1920년대 회춘 연구가 과학적 의학과 돌팔이 의학 사이에 존재하며 불안정한 지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행위자들이 회춘 치료의 과학적 지 위를 정당화하려 했던 과정과 슈타이나흐 수술에서 호르몬 연구로의 이행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분석한 것보다 이 시기 슈타이나흐 수술이 훨씬 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본 논문은 슈타이나흐 수술의 의학적 지위를 둘러싼 논쟁과 회춘 치료의 정당화 및 상품화를 중심으로 1920년대 미국에서의 슈타이나흐 수술 흥망의 역사를 분석하며, 그 역사가 회춘을 둘러싼 소비 문화의 등장 및 변화와 궤 를 같이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자 한다. 첫째, 1920년대 미국에서는 회춘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과장성이 회춘 연구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이들의 의구심을 가중시켰다. 이때 슈타이나흐 수술이 “돌팔이 의학(quackery)”이라고 비판받은 것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의 대변자 모리스 피쉬베인(Morris Fishbein, 1889-1976)을 필두로 한 미국 의료계가 규제 기관으로서 권위를 세우려는 가운데 회춘 치료의 지 나친 상업화에 대응하는 전략이었다. 둘째, 피쉬베인의 비판에 대응하여 회춘 을 과학 연구로서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벤자민은, 화학자 카지미르 풍크(Casimir Funk, 1882-1967)와의 협업을 통해 회춘 호르몬 연구의 상품 화 목표를 내세우며 이 연구가 진보한 과학 연구이자 과학적 성취임을 주장 했다. 성호르몬의 상품화를 통해 과학적 의학을 정의하는 새로운 관점은ii 1930년 호르몬 연구 전반에서 상업화를 추동하던 미국 화학계에서 수용될 수 있었고, 이는 피쉬베인이 슈타이나흐 수술에 대한 비판을 그만두고 벤자 민이 호르몬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여 회춘 연구를 지속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본 논문은 1920년대 동안 무분별한 회춘 치료와 상품 의 범람으로 돌팔이 의학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회춘 연구가 1930년 상품화 의 목표를 내세우고 호르몬 연구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의학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음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