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과학기술학(STS)은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과학기술정책의 형성과정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런 현상을 지칭하는 ‘참여적 전환’(participatory turn) 논의는 기술 의 초창기에 시민사회의 참여를 강조하는 ‘상류지대 참여’(upstream engagement) 논의로 발전했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2000년 초반부터 2020년 전후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나노기술 위험 거버넌스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비교 연구를 통해 살펴봤다. 양국간 비교의 관점은 사전주의적 제도, 사전주의적 실천, 시민사회의 참여 및 나노물질 규제 거버넌스 측면으로 구분했다. 미국과 한국은 나노기술 관련 정책과 사안들의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을 공유하면서도 국가별 맥락 에 따른 차별성을 보였다.
2000년대 초반에 수립된 미국의 국가나노기술계획(National Nanotechnology Initiative)과 한국의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은 각각 국가경쟁력의 ‘유지’와 ‘제고’라는 유사한 목적 하에 추진됐다. 미국과 한국은 이 계획들의 수립 이후 나노기술연구개발 관련 법률도 제정했는데, 양국은 공통적으로 ‘사전주의적 활동’ 에 대한 근거 조항을 법률에 포함했다. 미국은 합의회의와 같은 시민참여적 사전주의 활동을, 한국은 시민참여가 명시되지 않은 기술영향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양국에서 정부 주도로 추 진한 나노기술 대상의 사전주의적 활동은 시민참여가 최소화 된 전문가 중심적인 것이었으나, 양국의 STS 연구자들은 연구 과제를 통해 합의회의, 시민모니터링 방식 등 다양한 시민참여 실험을 수행했다.
나노기술과 관련한 잠재적인 위험성 논쟁의 경우, 2000년대 초반의 ‘그레이 구’ 논쟁으로부터, 자외선 차단제로 사용된 나노물질의 위험성 논쟁, ‘은나노 세탁기’의 위해성 논쟁 등이 존재했다. 미국과 한국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논쟁의 양상이 다 르게 진행됐는데, 예컨대 ‘은나노 세탁기’ 사안의 경우 미국에 서는 세탁 폐수에 포함된 은나노 물질의 생태계 환경 위해성이, 한국에서는 은나노 물질의 항균성과 살균성에 관한 실재 여부가 논쟁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나노물질의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한 관리는 환경보건안전(Environmental, Health, and Safety) 측면에서 환경부처인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과 환경부가 주도했다. 양국은 나노물질을 화학물질 차원으로 관리하기 위해 화학물질 관련 법과 살생물제 관련 법의 제·개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과적으로 관련 법제의 제·개정 없이 EPA의 행정지침을 통해 나노물질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추진한 반면에, 한국은 화학물질등록평가법과 생활화 학제품안전법의 제·개정을 통해 환경부가 나노물질을 규제하 기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했다.
각국 정부가 나노물질 규제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는, 미국의 경우 시민사회가 ‘은나노 세탁기’의 생태계 환경 위해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나노물질 규제청원을 한 것이었으며, 한국에서는 시민사회가 ‘가습기 살균제’의 인체 위해성 문제를 지적하면서 독성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양국 정부가 나노기술(나노물질) 규제 시 적용한 원칙은 서로 달랐다. 미국은 ‘책임성 있는 개발’과 ‘최선의 가용 한 과학적 증거’를 원칙으로 했으며, 한국은 암묵적으로 사전 주의 원칙과 유럽연합의 화학물질 규제 기준(REACH)과 같은 국제기준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이 논문을 통해 나노기술의 초창기인 ‘상류지대’에서 이뤄진 기술영향평가 등의 사전주의적 활동에서 시민참여는 제한적이 었으나, 나노물질이 제품화된 단계인 ‘하류지대’에서 시민사회 의 자발적인 참여가 정부의 관련 정책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 끌어 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노기술정책 추진과 정에서 논의가 발전되어온 ‘책임성 있는 연구와 혁신’ 측면에 서 볼 때, 나노기술 연구계와 산업계는 시민사회와 더 소통하 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STS 분야는 과학기술과 시민사회간 교량적 역할을 통해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